삶과 생각과 일2012. 3. 7. 16:28




공자는 예순 살이 되면 이순(耳順)이라고 했습니다.

귀가 순해진다는 것인데, 그 뜻은 여러 가지로 풀이됩니다.

남의 말을 들으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고도 풀고,

혹은 무슨 말을 들어도 거슬리는 바가 없는 경지라고도 풀죠.



공자라면 이순이 됐을 것 같습니다. 당대의 성인이요 지혜로운 스승의 대표 아니 당연할 듯 싶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이순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큰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와 경륜이 없는 사람이

자기가 이순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만을 넘어 위험한 일입니다.

살만큼 살았고 알만큼 알고 있으니 다른 사람 말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위험한 사람입니다.

동요가 없으니 겉모양은 이순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실은 전혀 듣지 않기 때문에 거슬리지 않는 것입니다.

고집불통일 뿐이죠.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지 6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경륜과 지혜가 쌓였을 법 합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이순이 되려면 한참 먼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유행어인 왕따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인터넷 세상에서도 왕따와 신상 털기가 일상다반사가 돼버렸습니다.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바로 해코지 하고 남의 말은 하나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그야말로 고사성어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곳에서 “따”가 넘쳐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모두를 따 시키고 왕따 당하는, 루소가 가정한 원시사회와 다를 바 없습니다.

유독 좀 더 심하게 당하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젊은이들만 그런가요?

나라를 이끌어 간다는 꽤 연륜 있어 보이는 사람들도 다른 이의 말을 듣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주장만 할 뿐 남의 말을 듣거나 타협하려 들지 않습니다.

설득이 아무 소용없다고 지레 포기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설득 당하려 하지 않는 사람을 절대 설득할 수 없다고 했었습니다.

정치권이나 시민 사회단체, 노동조합, 재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날 선 주장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 쪽은

곧바로 서민의 적, 노동자의 적, 민주주의의 적으로 매도되고 맙니다.

배려와 타협은 변절로 치부되죠.

자신들 안에서도 전혀 타협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제기된 주장의 수만큼 계파가 나뉘게 됩니다.

계파간의 이해는 평행선으로 대립하며

이것이 노동계 및 운동권 내부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기업인들은 당장 조금만 비용이 더 들라치면 무조건 반대하고 나섭니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은 관심 밖인가봅니다.



남 탓 하지 말고 조금씩 겸손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아직 말하기 보다는 더 많이 듣고, 들리는 말을 잘 이해하고자 노력해야할 단계이지,

이순의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하지 않을까요?

반드시 관철해내겠다는 식으로 선을 긋지 말고,

상대방 말이 일리가 있다면 설득 당해 줘도 좋다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공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끝>


※ 직장에서 일 삼아 썼습니다. 결재가 되면 누구 이름으로 나가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내 글이라고 할 수 있는 지금 상태 그대로 한 번 올려봅니다.

※ 소개하고 싶은 글이 있어서 링크를 걸어봅니다.
http://news.donga.com/3//20061216/8385775/1






Posted by 無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