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2.08.24 사모 - 조지훈
  2. 2012.03.07 조용한 일
  3. 2010.01.03 허벅지 맨살을 스치는 - 이성복
  4. 2010.01.01 고독의 기원 - 강연호
  5. 2009.12.17 엄마걱정 - 기형도
  6. 2009.12.10 흔해 빠진 독서 - 기형도
좋아하는 시2012. 8. 24. 15:58

 

 

 

사모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있음을 알았을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 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Posted by 無逸
좋아하는 시2012. 3. 7. 16:23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김사인


Posted by 無逸
좋아하는 시2010. 1. 3. 20:43












                겨울 아침밥 먼저 먹고

                화장실에서 들으면

                아이들 숟가락 밥그릇에

                부닺기는 소리,

                먼 옛날 군왕의 행차 알리는

                맑은 편종 같고,

                말방울 여운 같고,

                어느 뒷날 상여 지나간 다음

                내 묘혈을 파는 괭이 소리 같다

                                                                               겨울 아침 아이들 숟가락

                                                                               사기 밥그릇에 부딪기는 소리,

                                                                               오줌 떨고 난 다음

                                                                               허벅지 맨살을

                                                                               스치는 오줌 방울처럼 차갑다








# 이성복 시인의 시는 확실히 독특해서
기형도 시인의 시만큼이나 딱 보면 알 듯한 것들이 많은 듯.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찾지 못해 시인의 얼굴을 겹친다.
Posted by 無逸
좋아하는 시2010. 1. 1. 04:10









               지금 그의 어깨는 고요하지만



               그가 잠들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를 둘러싼 입자들의 미세한 파동은



               어딘지 경건한 데가 있다



               귀 기울이면 낮게 살얼음이 잡힌다



               허나 위로받고 싶지 않아서 그는 돌아눕는다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만나는 법



               눈물밖에는 없다








# 강연호님의 시집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에 실린 시입니다.
날치기 글만으로 새해를 시작하기는 좀 그래서 시도 옮겨봅니다.


Posted by 無逸
좋아하는 시2009. 12. 17. 15:12








열무 삽심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



#  위 그림은 '엄마마중' 동화책에 있는 삽화입니다.

Posted by 無逸
좋아하는 시2009. 12. 10. 12:52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은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달라고


                                                         - 기형도 -

Posted by 無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