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일들2012. 2. 22. 14:11


저는 민족주의자는 아닙니다만..

거짓된 역사를 배우는 것은

제 자신의 삶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숭고한 희생과 노력을 도둑질해서는 안된다고 믿습니다.








Posted by 無逸
옛 일들2010. 2. 19. 15:17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처음 글을 올리게 되는군요.

한자체 폰트를 올려봅니다.

전서체, 예서체, 초서체, 해서체, 행서체입니다.


을파소님 블로그(http://blog.daum.net/myunggyu/10678179)에서 퍼왔습니다^^


















Posted by 無逸
옛 일들2009. 12. 18. 19:22




투탕카멘과 그의 아내 안케세나멘의 이야기입니다.

하워드 카터에 의해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되었을 때...  
투탕카멘의 관에는 제왕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수레국화 한 다발이 놓여있었습니다.

투탕카멘은 왕권이 약화되었을 때 어린 나이(10세 또는 11세)로 왕위에 즉위했습니다.
투탕카멘은 전왕이었던 아케나텐의 자식이 아니고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는 아케나텐이 사망한 후 아케나텐의 부인인 왕비 네페르티티에 의해 왕위에 옹립되었습니다.
부모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은 투탕카멘의 정치적 배경이 되어줄 세력이 없다는 뜻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위에 올랐으나 아직 어렸기 때문에 실제 정무를 행한 것은 후견인인 재상 아이와 장군 호렘헤브 등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왕권은 약해져가는 반면 후견인들과 아멘 라 신관들의 세력은 점점 더 강해졌죠.
 
투탕카멘이 즉위하자 선왕 아케나톤에 의해 국교로 정해진 아텐 신앙은 무너지고 아멘 라 신앙이 다시 국교로 부활했습니다. 투탕카멘도 이에 따라 '투트 앙크 아텐'(아텐 신의 살아있는 닮은꼴)에서 '투트 앙크 아멘'(아멘 신의 살아있는 닮은꼴)으로 개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투탕카멘이라고 짧게 부르는 것입니다.
왕비였던 안케세나멘도 '안케세파텐'에서 '안케세나멘'으로 개명됐습니다.



 

 

 

투탕카멘의 묘에 넣어진 조상과 일상용품에 그려져 있는 투탕카멘과 안케세나멘의 일상 모습에는 이 어린 커플이 서로 사랑하며 살았음을 보여주는 따스함이 있습니다.

특히 의자에 앉은 투탕카멘에게 안케세나멘이 향유를 바르는 광경이 묘사된 황금 옥좌 등받이에 그려진 채색 부조는 부부 사이의 다정함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투탕카멘은 20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19세에 죽었다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죽은 이유와 관련하여, X선으로 미라를 조사한 결과 두개골 후두부에 몽둥이 같은 것으로 얻어맞은 구멍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호렘헤브 장군에 의해 암살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이도 있습니다. 혹자는 전차를 타고 사냥을 하다가 낙상하여 사망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아케나텐의 종교개혁 실패에 뒤이은 격동의 시대에, 급류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운명에 농락당한 투탕카멘의 인생은 허무하게 짧은 삶이었습니다. 투탕카멘이 죽었을 때 왕비 안케세나멘은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투탕카멘과 안케세나멘 사이에는 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두 태아의 DNA를 검사한 결과 투탕카멘의 쌍둥이 딸들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투탕카멘의 묘에 태아인 두 딸이 함께 매장된 것에는 또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투탕카멘의 사후에 누가 왕위를 이을 것인가가 문제되었습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투탕카멘의 후견인이자 재상으로서 정무를 담당하고 있던 아이였습니다. 아멘호테프3세 시대부터 왕가를 섬겨 온 그는 이미 상당한 고령이었지만 왕위 계승권을 가진 안케세나멘과 혼인하여 왕위에 오려고 계책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안케세나멘은 이를 혐오했던 모양입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히타이트의 슈필리우마 왕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왕자 중 한 명을 신랑으로 맞아 이집트의 새 왕으로 삼고 싶다는 뜻을 전한 것입니다. 몇 통의 편지가 오간 뒤, 슈필리우마는 그 뜻을 이해하고 왕자 잔난지를 이집트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안케세나멘 앞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도중에 암살되었을 거라지만 진상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안케세나멘은 늙은 재상 아이와 재혼했고 아이는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왕조 내부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고 왕권은 유명무실해진 뒤였습니다. 고령이었던 아이의 재위는 불과 4년만에 끝나고 말았고, 아이의 뒤를 이어 장군 호렘헤브가 즉위했습니다. 일종의 군사 쿠데타였죠.

투탕카멘의 왕비였던 안케세나멘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와 재혼한 기록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마도 아이가 왕위를 계승할 목적으로 재혼을 하고는 그 후 적국 히타이트의 왕자를 불러들이려 한 음모의 책임을 물은게 아닐까 추측하는 이도 있습니다. 살해당했는지 추방되었는지, 아니면 왕궁 한 구석에서 죽은 투탕카멘을 그리며 혼자 쓸쓸히 여생을 보냈는지.. 안케세나멘에게는 어린시절 투탕카멘과의 결혼과 사랑이 삶을 버티게 해주는 힘인 동시에 이겨내기 힘든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하워드 카터가 투탕카멘의 관을 열었을 때 눈부신 황금 마스크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투탕카멘의 머리 옆에 놓여진 수레국화 한 다발이었다고 합니다. 수레국화가 피는 계절에 장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수레국화 꽃다발은... 소년 왕을 그리워한 젊은 왕비가 갖다 놓은 것일까요?

유물이나 흔적을 보고 추측하게 되는 과거의 일이란 실제로 있었던 일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죽음에 이른 소년왕의 관과 그 위에 올려진, 제왕에게 드린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게 소박한 꽃다발을 보면.. 3천년 전의 애틋한 사랑과 슬픔을 떠올리는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어떤 글에 보니까 무덤을 발굴한 카터는 그 때의 감회를 '투탕카멘 발굴기'에서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인간의 소박한 심정을 표현하는, 관 주변에 놓여있던 작은 꽃다발이었다. 우리는 이 꽃다발을 , 남편을 잃은 어린 왕비가 두 개의 왕국을 대표했던 젊은 남편에게 바친 최후의 선물로 생각하고 싶다. 여기저기 황금빛 찬란한 제왕의 호화로움과 화려함 속에서, 아직도 아련히 색을 간직한 작은 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그것은 3천3백 년이라는 긴 세월조차 극히 짧은 시간,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 불과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 2003년 8월 5일에 썼던 글입니다.
최근에 언론에 보도되었던 연구성과를 반영해서 살짝 손봐서 올립니다.

Posted by 無逸
옛 일들2009. 12. 16. 23:42

 
[2008년 여름 명박산성의 모습입니다. 제가 찍은건 아니죠]



"今臣戰船尙有十二隻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금/신/전선상유십이척//출/사력/거전//즉/유/가위/야)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남아있사오니, 나아가 죽기로서 막아 싸운다면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 尙 : 오히려 상 / 猶 : 오히려 유 / 拒 : 막을 거

친절하게.. 옥편노릇까지^^;;;
어때요?? 한자를 읽어도 이해할 수 있겠죠??

충무공의 전기나 해전사를 읽을 때면.. 언제나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말이고..
때로는 남몰래 눈물을 닦기도 했던 대목입니다..
임진왜란 7년간 이루어진 해전 진행을 따라가지 않고.. 느닷없이 위 문장을 읽으면..
전부터.. 자주 들어왔던 상투적인 말로밖에는 안들리겠죠.

하지만.. 1597년..
그러니까.. 임란 전 약 2년,
임란 발발 후 약 5년간을 갈고 닦아오던 최강의 함대와, 생사를 같이 했던 2만여 장병들이
잠깐 사이에.. 모두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 조각과 시체들로 변했던 그해 여름의 어느날...

그 끔찍했던 순간을 잔해를 통해 확인하면서.. 어느 지휘관의 마음이 찢어지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신림동에 오는.. 전철에서 임진왜란 해전사를 읽었습니다..

5년의 전란.. 사방에 가득 널린 시체와 그 타는 냄새.. 피난 가서 연락도 하기 어려운 임금..
망망대해에 오직 전라좌수영과 우수영의 함대밖에는 남지 않은 고립무원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인데..
이젠.. 그나마 남은 함대도 전멸하고.. 부서진 판옥선 12척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때..


그 12척으로 남해안에 바글바글하는 왜군과 전투를 벌일 생각을 했을 때..
충무공은 얼마나 기가막혔을까요...
당시에는 왜군의 거의 전 병력이 경상남도 남부에 집결해 있을 때라서..
총 16만여명의 적과 맞서 싸울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그 중에는 육군도 있으니 빼야한다고 생각하시겠죠??
하지만.. 당시 왜군은 육군과 수군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배를 타면 수군, 땅에 서면 육군..
그런 샘이었죠.
그에 비하면.. 비록 양신역천일망정 조선은 육군과 수군이 엄격히 구별되어있었으니..
이미 전문성에서 앞서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기는 하겠습니다.

난중일기 곳곳에는 충무공이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하지만.. 12척만을 거느리고 133척과 맞서러 나아갈 때..
충무공께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오직..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손자의 말을 병사들에게 다짐 시키고 있죠...

왜.. 이 글을 쓰냐구??

그냥...

405년 전... 임진왜란이 끝나기 2년 전....
정말 기가막혀서 말도 안나오는 상황에 처해있던..
하지만.. 맞서서  그 격랑을 해쳐야만 하는 숙명을 지녔던..
그 기막힌 사내가 갑지기 떠올랐을 뿐입니다.




# 2002년 12월 23일 제 카페 서른사춘기(http://cafe.daum.net/fourspring/)에 적었던 글입니다.
오늘은 .. 옛 글들을 추억하는 날 인 듯 합니다.
Posted by 無逸
옛 일들2009. 3. 3. 20:10

                          

제목: [펌]밥드시러 6.25 참전하신 아버지 ㅎㅎ
이름: 돌쇠4
등록일: 2008-06-26 15:00
※ 요즘 얘기가 많다는 다음 아고라에서 나야나님의 글을 펐습니다.
    읽으신 분 많으시겠지만.. 재밌고 뭉클하게 읽어서 매냐님들과 함께 읽고싶어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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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집에 같이 살고 계신 저희 아버지는 올해 연세가 78세 되셨습니다.

이분은 6.25 참전 용사 입니다.


몇년전 상영했던 "태극기 휘날리며"란 영화를 전 아버지와 같이 봤습니다.

그 영화를 참 감동 깊게 감상을 하고 이런 영화를 참전용사이신 아버지와 같이

본다는 것도 저한테는 영광이라면 큰 영광이었고 또 아버지에게 진한 향수와

감동을 전하기 위해서 였죠


영화가 끝나고 박수도 간간히 들려 왔고 눈물을 훔치시는 분도 계셨다고 생각

했습니다. 전 촉촉히 젖은 아버지의 눈망울을 보려고 극장 출구에서 아버지와

눈을 마주 쳤습니다. 그러나...


저희 아버지 별 반응도 없으시고 눈가에 이슬은 고사하고 어떻게 보면 쓴웃음까지

짓고 계시더군요


"아버지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영화 잘 만들었죠"

저의 물음에 아버지는


"지랄하고 있네, 영화란게 원래 공갈이지만 참 공갈 많이 친데이"

"언 넘이 저리 고개 빳빳이 쳐 들고 총 쏜다 카노?"


저희 아버지는 휴전 되기 8개월전에 군에 입대하셔서 가장 치열 했다던 휴전

막바지 서부전선 전투에 임하셨더 분입니다. 바로 태극기 휘날리며의 마지막

전투신이 아마도 아버지가 참전하신 전투 정도가 되겠죠.

영화를 보고나서 아버지의 싸늘한 감상평에 저 또한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얼마전에 5학년 아들녀석이 6.25에 대해 물어 보길래 할아버지에게 여쭤보라고 했습니다.

6.25의 산 증인 이시니 가장 정확한 답변을 해주실거라 했죠.

그리고 전 아버지에게 넌지시 부탁을 했습니다.

"아버지 애들한테 들려주시는 얘기니까 좀 뭐하지만 감동적으로 부탁 드립니다."



제가 참전한 전투도 아니지만 전 제 아이들에게 할아버지의 활약상을 들려줄수 있는

사실에 혼자 흐뭇해 했습니다.


"젤 기억에 남는 전투는 어디였어요? 영화에서 보면 밤에 백병전도 하고 그러던데"

뭔가 기억을 되살리시던 아버지

"전투고 지랄이고 구디 파는거 밖에 기억 안난다"

"구디요?"

"구덩이.. 참호.. 하여간 주먹밥 하나 주고 밤새 구디 파놓면 여기 아니라카고 딴디로
옮겨서 또 가면 또 구디 파라카고. 구디 다 파놓으면 또 잘못 왔다고 옮기고..
내가 판 구디 다 합치면 지금 지하철 하나는 팠을 끼다"


내심 제가 의도했던 얘기가 아니라 전 조금 당황해서

"아버지 총 쏜 얘기 해달라고요 전투 얘기요"

다시한번 기억을 더듬으시더니

"구디 안에서 있다가 폭탄 떨구면 가만 쪼그리고 있으면 되고 그담에 북한군이 몰려올라오면
고개 한번 내밀고 방향 잡고 머리 구디 안에 파묻고 총만 내밀고 쏘는기라
어데로 쏘는 지도 몰라 그냥 쏘는 기라 6개월 총을 쐈는데 내 총에 맞은놈이 있는지 몰라..."


아무리 현실적인 얘기도 좋지만 이런 얘기 하실때는 흔한 말로 구라가 조금 들어가도

되는데 너무 고지식한 아버지..


전 마지막 히든카드로 조국과 가족을 위해 참전하시게 된 동기를 물었습니다.

너무나 융통성 없으신 아버지


"밥 먹으로 갔다"

"네?"

"전쟁통에 먹을건 없고 굶어 죽나 총 맞아 죽나 군대가면 밥 준다케서 갔다"

전 생각했습니다.

원고지 10매 내외로 좀 감동적이고 스펙타클한 전쟁 얘기 지어서라도 아버지 한테

써 드려야 겠다고...


제가 중3때라고 기억합니다. 윤리 과제 중 하나로 조상님들 중에 위대하신 분들을

조사해오란 과제가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인터넷이다 뭐다해서 참고할 자료가 많지만

그때는 달랑 족보 하나 가지고 찾았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눈에 띄는 벼슬을 한 분이 안계시더군요 그래서 전 16절지 시험지에

딱 두줄 썼습니다.


31대손 - 할아버지 - 농부
32대손 - 아버지 - 6.25 참전용사


사실 이분들이 저에겐 젤 위대한 조상 아니겠습니까..

20점 만점에 5점 주더군요 ㅋㅋㅋ.


비록 아버지가 말씀은 멋 없게 하셨지만 전 아버지의 6.25 참전이 자랑스럽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하신말씀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죽은사람은 말이 없어...그래서 전쟁에서 산사람은 더 말이 없어야 하는 기라"



Posted by 無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