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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2.21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청년화가 L을 위하여- - 함형수
- 2009.12.21 「직장 내 집단 괴롭힘(mobbing)에 대한 연구」 개요 2
- 2009.12.21 영국과 우리나라의 노사관계 및 노동법제의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
- 2009.12.18 투트 앙크 아멘 - 수레국화 1
- 2009.12.17 사평역에서 - 곽재구
- 2009.12.17 엄마걱정 - 기형도
- 2009.12.16 今臣戰船尙有十二隻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2
Ⅰ. 논의의 기초
직장 내 집단 괴롭힘의 문제는 전 세계 공통의 문제이며, 단순하고 일시적인 현상으로 취급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형법, 민법은 물론 노동법적 시각에서 이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ILO, EU 등 국제기구와 유럽의 여러 나라, 일본 등에서는 이미 직장 내 집단 괴롭힘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연구의 영역은 임상병리학적 심리적 연구 외에 사회학 및 경영학, 법학 전 분야에 미친다. 국내에서도 오래전부터 집단 내 괴롭힘을 이유로 근로자가 자살하거나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은 사례가 나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 내 집단 괴롭힘 문제에 대한 국내의 연구, 특히 법학 분야에서의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직장 내 집단 괴롭힘을 나타내는 학문적 용어로는 mobbing과 bullying이 주로 사용된다. 국내에서는 음해행위와 정신적 괴롭힘, 따돌림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아직 이를 지칭하기 위해 확립된 용어는 없다. mobbing이나 bullying을 직접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겠으나, “직장 내 집단 괴롭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된다. 이 연구에서 검토의 대상으로 삼은 직장 내 집단 괴롭힘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그 괴롭힘 행위가 다수인에 의하여 특정 근로자에게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괴롭힘 행위이어야 하고, 그 괴롭힘 행위가 의도적이고 반복적이어야 하며, 상당기간 지속되어야 한다. 또한 피해 근로자에게 인격권의 침해와 근로조건의 악화라는 손해가 발생하여야 한다는 객관적 성립요건과 가해 근로자들에게 특정 근로자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 또는 인식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는 주관적 성립요건이 있어야 한다. 다수인이 공동으로 괴롭히고 있다는 공동성에 대한 인식이나, 특정 근로자를 “직장으로부터 배제하기 위한 의도”라는 가중된 주관적 의도는 필요하지 않다고 해야 한다. 이러한 가중된 주관적 의도를 인정할 경우 피해 근로자의 보호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Ⅱ. 자율적 해결 유도를 위한 의무 부과
직장 내 집단 괴롭힘이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를 직접 규율하는 법률이 없다. 직장 내에서 발생하는 집단 괴롭힘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과 피해자 보호를 위해서는 해당 사업장의 사용자와 근로자, 노동조합의 자발적인 노력이 가장 중요하고 효율적이겠지만, 자율적 노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법률을 통한 강제가 불가피할 것이다. 서구의 여러 나라들은 직장 내 집단 괴롭힘을 규율하기 위한 법령들을 제정하여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대처하고 있다.
사업장에서 집단 괴롭힘이 발생한 경우 사용자는 적극적으로 피해 근로자를 보호하고 그 근로자가 정상적인 근로환경에서 근로를 제공할 수 있도록 가능한 조치를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노동조합도 피해를 당한 조합원의 구제와 보호를 위해 사용자에게 적절한 조치를 위할 것을 요구하고, 가해 근로자들와 피해 근로자가 조합원이라면 당사자 사이의 원만한 문제해결을 위해 조정에 나서는 등의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사용자 또는 노동조합이 피해 근로자의 구제보다는 가해 근로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태도를 취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사업장 내의 단체협약이나 노사협의회 규정, 취업규칙 등을 통하여 노동조합과 사용자가 직장 내 집단 괴롭힘의 피해 근로자를 지원하도록 의무지우고, 적절한 절차를 구축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그 방법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근로기준법,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 등 관련 법률에 단체협약과 취업규칙 등에 노동조합과 사용자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절차를 마련하도록 하는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위와 같은 강제 규정이 없더라도 피해 근로자를 보호하여야할 필요가 있으며, 그 근거는 현행법의 규정과 파생 원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사용자에 대해서는 안전배려의무, 균등대우의무 등을 근거로 직장 내 집단 괴롭힘을 방지하고 그러한 행위가 발생했을 경우 적절한 조치를 위할 의무를 부담하도록 할 수 있다. 또한 사용자의 중간관리자 또는 특정 근로자가 사용자의 근로자에 대한 안전배려의무 또는 균등대우의무의 이행보조자가 되는 경우에는 직장 내에서 발생한 집단 괴롭힘 사건의 피해 근로자에 대해 사용자가 이행보조자책임을 부담하게 될 수도 있다. 민법 제765조에 의한 사용자책임도 적용될 수 있다. 직장 내 집단 괴롭힘은 대개 근로시간 중에 사업장 내에서 발생하며, 사용자 또는 중간관리자에 의한 괴롭힘은 업무지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직장 내에서 발생하는 집단 괴롭힘 행위는 외형상 객관적으로 사무집행 관련성이 인정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근로자가 고충처리를 신청한다면 사용자는 그 근로자의 고충처리를 위해 적절한 조치를 할 의무를 부담한다. 중간관리자도 근로자들에 대하여 안전배려의무, 균등대우의무 등을 이행하는 사용자의 이행보조자가 되며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근로자에게 손해가 발생하고 사용자가 이를 배상한 경우 사용자에 대하여 책임을 부담한다. 동료. 근로자에 대해서는 근로계약이 직장 내 집단 괴롭힘을 하지 않도록 하거나 또는 발생을 방지하도록 하는 의무를 부담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근로자를 사용자의 안전배려의무나 균등대우의무를 이행하는 이행보조자가 된다고도 볼 수도 없다. 다만, 사용자와의 근로계약에 대한 부수적 의무로서 성실의무를 부담하는데, 동료 근로자에게 집단 괴롭힘을 가하는 것은 사용자의 이익을 저해하는 행위로서 성실의무 위반이 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단체협약 또는 취업규칙에 직장 내 집단 괴롭힘 방지 의무가 규정되어 있거나, 집단 괴롭힘이 발생했을 경우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경우 그 단체협약 등의 적용을 받는 사용자와 근로자는 그에 따른 의무를 부담한다. 사업장 내에서 집단 괴롭힘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거나 실제로 발생한 경우 재발 방지를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로는 정기적인 직장 내 집단 괴롭힘 예방 교육, 사업장 내 각종 규정 및 단체협약 등의 정비, 집단 괴롭힘 가해 근로자에 대한 적절한 지시권 행사 및 징계, 가해 근로자 및 피해 근로자에 대한 배치전환 등을 고려할 수 있다.
Ⅲ. 직장 내 집단 괴롭힘에 대한 법적 책임
직장 내 집단 괴롭힘 행위로 인해 특정 근로자에게 손해가 발생하였다면, 괴롭힘 행위를 한 근로자에 대하여는 불법행위 책임이 성립할 수 있다. 직장 내에서의 집단 괴롭힘으로 인한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청구권, 명예회복청구권과 병행하여 방해배제ㆍ예방청구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직장 내 집단 괴롭힘이 불법행위를 구성할 경우 가해 행위자들은 피해 근로자에 대하여 공동불법행위의 책임을 진다. 직장 내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한 근로자의 근로제공 능력이 현저하게 손상되거나, 근로를 제공할 수 없게 된 경우에 사용자는 가해행위를 한 근로자들에 대하여 제3자에 의한 채권침해 법리에 따라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다. 집단 괴롭힘 행위가 형법상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할 경우에는 가해 근로자들에 대해서는 형법 각칙에 규정되어 있는 범죄가 성립할 수 있다. 성립이 가능한 범죄의 유형으로는 절도죄, 손괴죄, 폭행죄, 상해죄, 명예훼손죄, 모욕죄, 협박죄, 강요죄, 살인죄 등이 있다. 형법학계에서는 특히 공동절교 통고가 명예에 대한 협박죄가 될 수 있는지 논의가 있다. 공동으로 절교하겠다는 통고를 통해서 피해자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는 충분히 피해자의 명예에 대한 협박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며, 집단적인 절교 통고는 형법 제284조의 특수협박죄에 해당하게 될 것이다.
형법상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직장 내 집단 괴롭힘 행위가 상급자의 명령에 따른 행위인 경우 그 명령이 법령상 근거에 의하여 적법하게 내려진 것이라면 괴롭힘 행위자의 행위는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고, 위법성이 조각되지 않는 경우에도 책임이 조각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Ⅳ. 직장 내 집단 괴롭힘을 규율하기 위한 입법
이상과 같은 현행법의 테두리 내에서의 해결 노력은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입법을 통한 해결도 반드시 고려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직장 내에서 발생하는 집단 괴롭힘을 사전에 방지하거나 사후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절차나 방법이 규정된 법률이 없다. 일부 법률에서는 괴롭힘, 집단 따돌림 등을 규정하고 그 개념을 정의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등이 그 예인데, 이들 규정은 각각 성을 이유로 한 차별이나 성희롱, 장애인에 대한 괴롭힘 등을 규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뿐이기 때문에 집단 괴롭힘으로부터 국민 또는 근로자 일반을 보호하기 위한 일반법으로서 인정되기는 어렵다. 참여정부 시기 정부가 입법예고 했던 차별금지법(안)이 집단 괴롭힘에 대해 정의하고 있었으나 정부가 교체되면서 사실상 입법이 무산되었다.
향후 입법을 통해 직장 내 집단 괴롭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선행 입법이 이루어진 외국의 사례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외국의 입법례를 보면 단일 법률을 제정하여 직장 내 집단 괴롭힘을 규율하는 경우와 여러 관련 법률을 통해 직장 내 집단 괴롭힘을 규율하는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스웨덴, 벨기에, 네덜란드 등이 전자에 속하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후자에 속한다. 이러한 외국의 입법례로부터 얻을 있는 시사점을 정리해보면 피해 근로자의 복귀를 지원할 수 있는 지원체계 구축과 피해 근로자 관점에서의 구제절차 정비, 사용자와 노동조합에 대한 집단 괴롭힘 감시 및 감독 의무 부과,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한 주목 필요성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직장 내 집단 괴롭힘을 규율하기 위한 입법에 있어서 그 법률의 형식은 집단 괴롭힘만을 규율하기 위한 단일 법률을 제정하는 것보다는 전체 노동관련 법률들 중 관련된 부분에 필요한 조항을 추가하는 방법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특별법의 양산은 바람직 하지 않고, 새롭게 대두되는 현상이라 할지라도 이미 구축되어 있는 전체 법체계 내에서 조화롭게 이해되고 해결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 제 석사학위 논문 내용을 축약해서 소개한 개요입니다.
아래 링크에서 원문을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1. 영국의 임금관련 법제도의 특징
영국의 노사관계는 흔히 자유주의 내지 자발적 행동주의라 번역될 수 있는 ‘voluntarism’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노사관계에서의 ‘voluntarism’은 더욱 정확히 표현하자면 “법을 통한 간섭의 자제”라는 의미라고 보는 것이 이해에 더욱 용이하다(박은정, ‘’영국의 부당노동행위제도‘, 「노동법학」 제19호, 2004. 12, 410쪽 이하). 영국 노동법의 이러한 전통은 임금법제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최근까지 임금은 전적으로 노동조합과 사용자 사이의 단체협약을 통해 결정되어 왔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태동한 나라로 산업혁명기 영국의 노동환경은 극단적인 저임금과 생명을 위협하는 노동강도로 대변될 수 있는 처참한 환경이었다. 이러한 노동상황은 ‘voluntarism’이라는 원칙을 배경으로 방치되었고, 노동조합을 통한 단결과 저항이 저임금과 극한의 노동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합법성과 자주성을 획득한 노동조합이 마침내 사용자와 교섭하여 조합원의 임금 및 근로조건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영국 노사관계의 토양에서 임금 및 근로조건을 법률이 아닌 노동조합이 체결하는 단체협약으로 결정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국가가 법률을 제정하여 개입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정부의 불개입도 ‘voluntarism’으로 설명되고 있다. 여기에는 영국이 전통적 불문법 국가라는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영국의 경제위기와 함께 ‘voluntarism’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1970년대 보수당의 집권 이후 노사관계를 규율하기 위한 각종 법률들이 제정되었다(김영환, 앞의 책, 3쪽 이하). 이러한 경향은 임금관련 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전히 ‘voluntarism’은 영국의 노사관계 및 노동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특징이자 가치이다. 그것은 1970년대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많은 법률들이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에 대한 국가적 규율은 EU의 조약과 지침 등을 제외하면, 1970년의 동일임금법(Equal Pay Act), 1996년의 고용권리법(Employment Rights Act), 1998년부터 시행된 국가최저임금법 등에 불과하며(Stephen Hardy, 'Great Britain', '「Encyclopaedia Labour Law」, KLUWER LAW, 2007, 132쪽) 나머지 영역은 많은 부분이 단체협약 또는 common law에 의해 규율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전통적으로 단체협약에 의해 규율되어 오던 영국의 임금결정 구조는 최근 들어 매우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Stephen Hardy, 앞의 글132쪽 이하). 1990년대 들어 단체협약의 전반적인 침체와 노동조합 및 단체협약의 분권화로 인해 단체협약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의 비율이 현저하게 낮아진 것이다(James Arrowsmith, '영국 임금교섭의 변화‘, 「국제노동브리프」, 2005. 6, 12쪽 이하). 단체협약을 통해 결정된 임금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의 비율이 1984년에는 60%에 이르렀으나, 1998년에는 29%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공부문에서는 단체협약의 적용을 통해 임금이 결정되는 비율이 2003년도에도 여전히 52%에 이르고 있지만, 이것도 1984년의 94%에 비하면 매우 큰 폭으로 낮아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단체협약 체제에 의해 결정되고 규율되었던 임금체계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임금이 더 이상 단체교섭과 협약을 통한 집단적 규율의 방식으로 결정되지 않고, 개별 근로자와 사용자 사이의 계약에 의해 결정되거나, 물가상승률을 비롯한 경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동되는 성과급의 폭이 커지는 등의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노사관계에 있어서 우리나라와 영국의 차이
영국의 노동조합의 역사와 노동자의 권리 획득의 역사는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정착시켜 나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우리나라 노동법 및 노사관계의 역사는 우리가 이미 경험하기 이전에 서구의 경험을 차용한 선험적인 법률이 먼저 규율한 내용을 따라가는 모양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매우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냈다.
영국은 공업화 과정에서 길드 체제가 무너지고 공장노동이 일반화 되면서 숙련직 계층이 무너지고 농민들이 경작지에서 추방되는 사태를 겪으며, 그들이 저임금 장시간 고밀도 노동의 공장 직공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겪었지만,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공업화 과정을 겪기 훨씬 이전인 1953년에 이미 근대적인 헌법상 노동3권과,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의 기본3법 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살인적 여성노동과 아동노동의 문제, 극단적인 종속성에서 초래되는 강제노동의 문제 등의 경험이 초창기 영국에서와 같이 본격적이고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우리는 공업화에 앞서 이미 단체교섭권이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었으며(김영환, 「영국의 임금수준 결정구조」, 한국노동연구원, 1997, 46쪽), 임금과 관련한 근로자들의 권리와 주장을 하나씩 관철해 나가는 과정을 겪기 이전에 이미 그것이 근로기준법에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영국에서는 임금에 관한 모든 사항이 단체교섭을 통해 결정되는 구조인 반면, 우리나라는 근로기준법상 임금체계를 전제로 하여, 소극적으로 임금의 액수와 인상률, 임금 이외의 각종 수당의 신설 및 폐지 정도가 교섭을 통해 결정되고 있을 뿐이다.
투탕카멘과 그의 아내 안케세나멘의 이야기입니다.
투탕카멘의 관에는 제왕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수레국화 한 다발이 놓여있었습니다.
투탕카멘은 왕권이 약화되었을 때 어린 나이(10세 또는 11세)로 왕위에 즉위했습니다.
투탕카멘은 전왕이었던 아케나텐의 자식이 아니고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는 아케나텐이 사망한 후 아케나텐의 부인인 왕비 네페르티티에 의해 왕위에 옹립되었습니다.
부모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은 투탕카멘의 정치적 배경이 되어줄 세력이 없다는 뜻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위에 올랐으나 아직 어렸기 때문에 실제 정무를 행한 것은 후견인인 재상 아이와 장군 호렘헤브 등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왕권은 약해져가는 반면 후견인들과 아멘 라 신관들의 세력은 점점 더 강해졌죠.
투탕카멘이 즉위하자 선왕 아케나톤에 의해 국교로 정해진 아텐 신앙은 무너지고 아멘 라 신앙이 다시 국교로 부활했습니다. 투탕카멘도 이에 따라 '투트 앙크 아텐'(아텐 신의 살아있는 닮은꼴)에서 '투트 앙크 아멘'(아멘 신의 살아있는 닮은꼴)으로 개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투탕카멘이라고 짧게 부르는 것입니다.
왕비였던 안케세나멘도 '안케세파텐'에서 '안케세나멘'으로 개명됐습니다.
투탕카멘의 묘에 넣어진 조상과 일상용품에 그려져 있는 투탕카멘과 안케세나멘의 일상 모습에는 이 어린 커플이 서로 사랑하며 살았음을 보여주는 따스함이 있습니다.
특히 의자에 앉은 투탕카멘에게 안케세나멘이 향유를 바르는 광경이 묘사된 황금 옥좌 등받이에 그려진 채색 부조는 부부 사이의 다정함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죽은 이유와 관련하여, X선으로 미라를 조사한 결과 두개골 후두부에 몽둥이 같은 것으로 얻어맞은 구멍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호렘헤브 장군에 의해 암살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이도 있습니다. 혹자는 전차를 타고 사냥을 하다가 낙상하여 사망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아케나텐의 종교개혁 실패에 뒤이은 격동의 시대에, 급류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운명에 농락당한 투탕카멘의 인생은 허무하게 짧은 삶이었습니다. 투탕카멘이 죽었을 때 왕비 안케세나멘은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투탕카멘과 안케세나멘 사이에는 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두 태아의 DNA를 검사한 결과 투탕카멘의 쌍둥이 딸들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투탕카멘의 묘에 태아인 두 딸이 함께 매장된 것에는 또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투탕카멘의 사후에 누가 왕위를 이을 것인가가 문제되었습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투탕카멘의 후견인이자 재상으로서 정무를 담당하고 있던 아이였습니다. 아멘호테프3세 시대부터 왕가를 섬겨 온 그는 이미 상당한 고령이었지만 왕위 계승권을 가진 안케세나멘과 혼인하여 왕위에 오려고 계책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안케세나멘은 이를 혐오했던 모양입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히타이트의 슈필리우마 왕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왕자 중 한 명을 신랑으로 맞아 이집트의 새 왕으로 삼고 싶다는 뜻을 전한 것입니다. 몇 통의 편지가 오간 뒤, 슈필리우마는 그 뜻을 이해하고 왕자 잔난지를 이집트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안케세나멘 앞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도중에 암살되었을 거라지만 진상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안케세나멘은 늙은 재상 아이와 재혼했고 아이는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왕조 내부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고 왕권은 유명무실해진 뒤였습니다. 고령이었던 아이의 재위는 불과 4년만에 끝나고 말았고, 아이의 뒤를 이어 장군 호렘헤브가 즉위했습니다. 일종의 군사 쿠데타였죠.
투탕카멘의 왕비였던 안케세나멘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와 재혼한 기록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마도 아이가 왕위를 계승할 목적으로 재혼을 하고는 그 후 적국 히타이트의 왕자를 불러들이려 한 음모의 책임을 물은게 아닐까 추측하는 이도 있습니다. 살해당했는지 추방되었는지, 아니면 왕궁 한 구석에서 죽은 투탕카멘을 그리며 혼자 쓸쓸히 여생을 보냈는지.. 안케세나멘에게는 어린시절 투탕카멘과의 결혼과 사랑이 삶을 버티게 해주는 힘인 동시에 이겨내기 힘든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하워드 카터가 투탕카멘의 관을 열었을 때 눈부신 황금 마스크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투탕카멘의 머리 옆에 놓여진 수레국화 한 다발이었다고 합니다. 수레국화가 피는 계절에 장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수레국화 꽃다발은... 소년 왕을 그리워한 젊은 왕비가 갖다 놓은 것일까요?
유물이나 흔적을 보고 추측하게 되는 과거의 일이란 실제로 있었던 일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죽음에 이른 소년왕의 관과 그 위에 올려진, 제왕에게 드린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게 소박한 꽃다발을 보면.. 3천년 전의 애틋한 사랑과 슬픔을 떠올리는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어떤 글에 보니까 무덤을 발굴한 카터는 그 때의 감회를 '투탕카멘 발굴기'에서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인간의 소박한 심정을 표현하는, 관 주변에 놓여있던 작은 꽃다발이었다. 우리는 이 꽃다발을 , 남편을 잃은 어린 왕비가 두 개의 왕국을 대표했던 젊은 남편에게 바친 최후의 선물로 생각하고 싶다. 여기저기 황금빛 찬란한 제왕의 호화로움과 화려함 속에서, 아직도 아련히 색을 간직한 작은 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그것은 3천3백 년이라는 긴 세월조차 극히 짧은 시간,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 불과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 2003년 8월 5일에 썼던 글입니다.
최근에 언론에 보도되었던 연구성과를 반영해서 살짝 손봐서 올립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곽재구 -
"今臣戰船尙有十二隻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금/신/전선상유십이척//출/사력/거전//즉/유/가위/야)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남아있사오니, 나아가 죽기로서 막아 싸운다면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 尙 : 오히려 상 / 猶 : 오히려 유 / 拒 : 막을 거
친절하게.. 옥편노릇까지^^;;;
어때요?? 한자를 읽어도 이해할 수 있겠죠??
충무공의 전기나 해전사를 읽을 때면.. 언제나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말이고..
때로는 남몰래 눈물을 닦기도 했던 대목입니다..
임진왜란 7년간 이루어진 해전 진행을 따라가지 않고.. 느닷없이 위 문장을 읽으면..
전부터.. 자주 들어왔던 상투적인 말로밖에는 안들리겠죠.
하지만.. 1597년..
그러니까.. 임란 전 약 2년, 임란 발발 후 약 5년간을 갈고 닦아오던 최강의 함대와, 생사를 같이 했던 2만여 장병들이
잠깐 사이에.. 모두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 조각과 시체들로 변했던 그해 여름의 어느날...
그 끔찍했던 순간을 잔해를 통해 확인하면서.. 어느 지휘관의 마음이 찢어지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신림동에 오는.. 전철에서 임진왜란 해전사를 읽었습니다..
5년의 전란.. 사방에 가득 널린 시체와 그 타는 냄새.. 피난 가서 연락도 하기 어려운 임금..
망망대해에 오직 전라좌수영과 우수영의 함대밖에는 남지 않은 고립무원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인데..
이젠.. 그나마 남은 함대도 전멸하고.. 부서진 판옥선 12척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때..
그 12척으로 남해안에 바글바글하는 왜군과 전투를 벌일 생각을 했을 때..
충무공은 얼마나 기가막혔을까요...
당시에는 왜군의 거의 전 병력이 경상남도 남부에 집결해 있을 때라서..
총 16만여명의 적과 맞서 싸울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그 중에는 육군도 있으니 빼야한다고 생각하시겠죠??
하지만.. 당시 왜군은 육군과 수군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배를 타면 수군, 땅에 서면 육군..
그런 샘이었죠.
그에 비하면.. 비록 양신역천일망정 조선은 육군과 수군이 엄격히 구별되어있었으니..
이미 전문성에서 앞서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기는 하겠습니다.
난중일기 곳곳에는 충무공이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하지만.. 12척만을 거느리고 133척과 맞서러 나아갈 때..
충무공께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오직..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손자의 말을 병사들에게 다짐 시키고 있죠...
왜.. 이 글을 쓰냐구??
그냥...
405년 전... 임진왜란이 끝나기 2년 전....
정말 기가막혀서 말도 안나오는 상황에 처해있던..
하지만.. 맞서서 그 격랑을 해쳐야만 하는 숙명을 지녔던..
그 기막힌 사내가 갑지기 떠올랐을 뿐입니다.
# 2002년 12월 23일 제 카페 서른사춘기(http://cafe.daum.net/fourspring/)에 적었던 글입니다.
오늘은 .. 옛 글들을 추억하는 날 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