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의 재갈량이 출사표를 던지고 마지막 북벌을 나설 때..
위(魏)를 몰아내고 한(漢)의 후예가 삼국을 통일하기를 바라던 사람들은 그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었다.
당과 신라의 대군이 계백의 5천을 전멸시키고 사비성에 들이닥쳤을 때..
많은 백제의 사람들은 주변의 큰 성들에 아직 수십만의 백제군이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세조의 찬탈을 슬퍼하며 단종을 왕으로 모시고 싶었던 사람들은..
명나라 사신을 맞는 연회에서 칼을 차고 세조 옆에 설 수 있을 줄 알았다고 한다.
남한산성에 갇혀 청군에 저항하던 선조와 신하들은..
의주의 임경업과 삼남의 많은 병력들이 곧 구원하러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보다는 조금 가까운 옛날, 박정희가 한강 다리를 막고 해병대를 동원해 서울을 장악했을 때..
전방에 포진해 있던 압도적 병력을 가진 1군이 박정희를 진압해 줄 것이란 희망에 매달렸던 사람들이 있었다.
전두환이 서울 병력과 공수여단들을 몰아 서울을 장악했을 때..
서울 주변의 나머지 9공수여단이 전두환을 진압해 줄 것이라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위의 희망들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현실적인 희망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뒤틀린채 흘러갔고 지금은 '만약'이라는 부질없는 가정으로만 남아있다.
경험으로 익힌 다른 기억도 물론 가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국회에서 의결됐을 때 그것이 '흐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들었던 촛불은 우리 손으로 '흐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었다.
하지만 그 기억이 벅차면서도 아픈 이유는
그런 경험이 말도 안되게 드문 일이라는 것, 그 경험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 때문이다.
지금 한나라당과 정부, 한노총, 경총이 복수노조 2년 6개월 유예, 전임자 Time-off 실시 6개월 준비기간을 야합한 상황에서..
민주당과 민노당, 민주노총이 무엇인가 해줄 것을..
이 파렴치한 선택이 '흐름'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결국 이렇게 흘러가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맥없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들이 이런 소망을 이뤄 준 기특했던 기억이 내겐 없기 때문이다.
야합과 때맞춰 무너져주는 센스를 보인 철도노조의 모습도
결국 지금의 "흐름"을 돌이킬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지..
수십년 전 일본 노동운동이 갔던 길을 절묘하게 뒤 밟아 가는 것만 같아 쓸쓸하다.